핵심 요약

어떤 이름은 아주 사소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1930년 봄, 영국 옥스퍼드의 한 아침 식탁도 그랬다. 열한 살 소녀가 밥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고, 할아버지가 신문을 펼쳐 그날의 큰 소식을 읽어 주었다. 태양계 끝에서 아홉 번째 행성이 발견됐는데 아직 이름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녀가 말했다. "플루토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그 한마디는 쪽지와 전보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몇 달 뒤 정말로 그 먼 세계의 이름이 됐다. 명왕성 이름은 이렇게, 천문대의 회의실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침 식탁에서 시작됐다.

이 이야기는 과학사에서 드물게 따뜻한 축에 든다. 거대한 망원경도, 복잡한 계산도 아닌, 로마 신화를 좋아하던 한 소녀의 순간적인 착상이 발단이었으니까.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 착상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소녀가 왜 하필 저승의 신을 떠올렸는지, 그 이름이 어떻게 지구 반대편 천문학자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 두 글자 속에 어떤 사람의 이름이 숨었는지를 차분히 따라가 본다.

1.이름 없는 행성 — 1930년 봄의 술렁임

1930년 3월, 로웰 천문대가 아홉 번째 행성의 발견을 알렸을 때 그 천체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세계가 저마다 이름을 제안하며 술렁였다.

발표 직후 온갖 이름이 쏟아졌다. 미네르바, 크로노스, 제우스 같은 신들의 이름이 오갔고, 발견을 이끈 사람이나 후원자를 기리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름을 두고 이렇게 왁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새 행성의 발견은 그 자체로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한번 붙은 이름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신중해야 했다. 발견의 무대였던 로웰 천문대는 명명에 관한 발언권을 어느 정도 쥐고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여러 제안을 살폈다. 발표 직후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름을 적어 보낸 편지가 천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저마다 아홉 번째 행성에 자기 이름을 얹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는 없었다. 수성부터 해왕성까지, 태양계의 행성들은 이미 하나같이 로마 신화의 신에게서 이름을 받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도 그 오래된 계보에 어울려야 했다. 문제는 '어떤 신인가'였다.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늘 어둠에 잠겨 있고, 수십 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이 희미한 세계. 여기에는 그 성질을 닮아, 밝고 화려한 자리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어두운 신의 이름이 필요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세계에는 빛에서 비켜선 신이 제격이라고, 사람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2.옥스퍼드의 아침 식탁 — 베네티아 버니

명왕성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영국 옥스퍼드의 열한 살 소녀 베네티아 버니였다. 1930년 3월 14일 아침, 할아버지가 읽어 준 신문 기사를 듣고 '플루토'를 떠올렸다.

베네티아 버니는 1918년에 태어난 아이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어린이책으로 즐겨 읽었고 태양계와 행성들의 이름에도 밝았다. 학문이 몸에 밴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성서를 가르치던 교수였고, 그날 아침 그녀와 함께 식탁에 앉은 할아버지 팰코너 마단은 옥스퍼드 보들리 도서관의 관장을 지내고 은퇴한 사람이었다. 마단은 《타임스》에 실린 새 행성 발견 기사를 소리 내어 읽어 주고는, 저 별을 무엇이라 부를까 궁금해했다. 짧은 침묵 뒤, 소녀의 입에서 "플루토"라는 이름이 나왔다.

왜 플루토였을까. 플루토는 로마 신화에서 명계, 곧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다. 그는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태양빛조차 희미하게만 닿는 어둡고 먼 세계, 오래도록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있던 행성에 이보다 잘 맞는 이름이 또 있었을까. 훗날 소녀는 "그저 아직 쓰이지 않은 이름이라 떠올렸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저승의 신을 어둡고 먼 별에 짝지은 그 감각은, 신화를 몸에 익힌 아이만이 단번에 맞힐 수 있는 과녁이었다.

3.전보를 타고 애리조나로

할아버지 마단은 이 제안을 옥스퍼드의 천문학 교수 허버트 홀 터너에게 전했고, 터너는 그것을 전보에 실어 애리조나 로웰 천문대로 띄웠다.

마단은 도서관장으로 일하던 시절 천문학자 친구가 여럿 있었다. 그는 손녀의 착상을 그저 흘려듣지 않고, 그날 마침 런던에서 왕립천문학회 모임에 나가 있던 터너에게 짧은 쪽지를 보냈다. 터너는 옥스퍼드의 새빌리언 천문학 교수였다. 훗날 소녀는 그를 '왕실 천문관'으로 기억했지만, 실제 그의 정확한 직함은 새빌리언 천문학 교수 쪽이다. 그 모임에 모인 천문학자들도 새 행성의 이름을 두고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무도 플루토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터너는 곧 대서양 건너로 전보를 쳤다. 전해지는 전보의 문구는 이렇다. "새 행성 이름, 어둡고 음울한 행성에 어린 소녀 베네티아 버니가 제안한 플루토를 고려해 주기 바람." 한 아이가 아침 식탁에서 내놓은 한마디가, 쪽지와 전보를 거쳐 며칠 만에 지구 반대편 천문대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이다. 대양을 사이에 두고 소식을 주고받는 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이름 하나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손을 바꿔 가며, 옥스퍼드의 식탁에서 애리조나의 사막까지 어렵지 않게 건너갔다.

한마디가 대서양을 건너간 길 베네티아 버니 (11) 옥스퍼드, 아침 식탁 "플루토라 부르면?" 1930년 3월 14일 팰코너 마단 할아버지 · 전 도서관장 쪽지로 전달 허버트 홀 터너 옥스퍼드 천문학 교수 전보를 침 로웰 천문대 애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이름을 받다 대서양 · 전보 모식도 · 인물·경로는 개념적으로 배치 · 근거: NASA 인터뷰(2006) / Wikipedia 'Venetia Burney'
열한 살 소녀의 한마디는 쪽지와 전보를 거쳐 며칠 만에 애리조나에 닿았다. 옥스퍼드의 아침 식탁에서 나온 제안이 할아버지와 천문학자의 손을 거쳐 대서양을 건넌 경로다.도식 · 경이의목록 (개념도) · 근거: NASA·Wikipedia 'Venetia Burney'

4.세 이름의 저울, 그리고 'PL'

로웰 천문대는 미네르바·크로노스·플루토 세 이름을 두고 투표했고, 플루토를 만장일치로 골랐다. 그 첫 두 글자 PL은 퍼시벌 로웰의 이니셜이기도 했다.

천문대에 도착한 후보는 미네르바와 크로노스, 그리고 플루토 셋으로 좁혀졌다. 이 가운데 미네르바는 이미 한 소행성(93 미네르바)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어 일찌감치 빠졌다. 크로노스는 당시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던 한 천문학자가 밀던 제안이라 좀처럼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남은 플루토에 천문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표를 던졌다. 세 이름을 저울에 올려 견준 끝의, 드문 만장일치였다. 명왕성을 직접 찾아낸 클라이드 톰보 역시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플루토가 이렇게까지 사랑받은 데는 뜻밖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의 첫 두 글자 P와 L. 그것은 이 수색을 처음 시작한 부자 천문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이니셜과 정확히 겹쳤다. 로웰은 정작 명왕성을 보지 못하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새 행성은 이름 속에 조용히 그를 품게 된 것이다. 두 글자를 겹쳐 만든 P–L 모노그램은 그대로 명왕성의 천문 기호가 됐다. 그리고 1930년 5월 1일, 플루토는 이 먼 세계의 공식 이름으로 채택됐다.

세 이름이 저울에 올랐고, 플루토가 남았다 투표에 오른 세 이름 미네르바 ✕ 이미 소행성 이름 크로노스 ✕ 인기 없는 제안 플루토 ✓ 만장일치 이름 속에 숨은 이니셜 PL P L u t o = Percival Lowell 모식도 · 근거: Wikipedia 'Pluto'(명명·투표·PL 모노그램) · 채택일 1930년 5월 1일
세 이름 가운데 플루토가 만장일치로 뽑혔고, 그 첫 두 글자 PL은 퍼시벌 로웰의 이니셜과 겹쳤다. 이름을 고르는 저울 위에서, 신화의 어울림과 창립자에 대한 헌사가 나란히 무게를 실었다.도식 · 경이의목록 (개념도) · 근거: Wikipedia 'Pluto' 명명 절차

한 아이가 지은 이름 속에, 그 행성을 평생 쫓은 노인의 이니셜이 숨어 있었다.

5.이름 뒤의 사람들 — 잊혔다가 다시 기려지다

베네티아 버니는 할아버지에게 5파운드를 상으로 받았고, 오랫동안 잊혔다가 훗날 여러 방식으로 다시 기려졌다.

소녀는 상으로 5파운드 지폐 한 장을 받았다. 1930년의 5파운드라면 아이에게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을 것이다. 사실 하늘의 천체에 이름을 붙이는 재주는 이 집안의 내력이기도 했다. 그녀의 종조부 헨리 마단은 1878년, 화성의 두 위성에 포보스와 데이모스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형제가 화성의 달을, 손녀가 아홉 번째 행성을 이름 지은 셈이니, 두 세대에 걸쳐 한 가족이 하늘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정작 세상은 오래도록 그 소녀를 잊고 있었다. 발견 당시의 기사들은 대개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고, 1984년 한 천문 잡지가 사연을 다시 알리기 전까지 그녀의 몫은 묻혀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그 빚은 넉넉히 갚아졌다. 2006년 뉴호라이즌스 탐사선의 학생용 먼지 계수기에 '베네티아 버니'라는 이름이 붙었고, 소행성 6235번과 명왕성 표면의 거대한 분지 하나(버니 크레이터, 2017년 국제천문연맹 공인)도 그녀를 기린다. 2015년 그 탐사선이 명왕성을 스쳐 지날 때, 소녀가 지은 이름은 우주선에 실려 마침내 그 세계에 닿았다. 한 가지 덧붙이면, 흔히 디즈니의 개 '플루토'가 이 행성에서 이름을 땄다고들 하는데, 그 개는 행성이 명명된 것과 같은 1930년에 등장했을 뿐 디즈니가 행성을 따랐다는 확증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재미있는 추정으로 남겨 둘 이야기다.

6.이름은 오래 남는다

이름은 사소해 보이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망원경도 탐사선도 언젠가는 낡고 멈추지만, 한번 붙은 이름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2006년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잃고 왜소행성으로 강등됐을 때조차, '플루토'라는 이름만은 그대로 남았다. 열한 살 소녀가 아침 식탁에서 무심히 내놓은 한마디가, 그렇게 한 세기 가까이 살아남아 지금도 우리 입에 오르내린다. 저승의 신에게서 온 이 이름은 어두운 세계를 정확히 가리키며, 발견의 순간보다도 오래 우리 곁에 머물렀다. 정작 그 별을 처음 찾아낸 사람의 이름은 잊기 쉬워도,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지 정한 한마디는 이렇게 끈질기게 남는다.

가만 생각하면 우리도 저마다 작은 이름들을 세상에 흘려 놓는다. 무심코 지은 별명, 서둘러 저장한 파일 하나, 반려동물에게 붙여 준 이름 같은 것들 말이다. 그중 무엇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 갈지 지금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도 그날의 소녀처럼,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마디를 가만히 건네 보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이 오늘 무심코 붙인 이름 하나가, 먼 훗날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가만히 닿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주 묻는 질문

명왕성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1930년, 영국 옥스퍼드의 열한 살 소녀 베네티아 버니가 처음 '플루토(Pluto)'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3월 14일 아침 식탁에서 할아버지 팰코너 마단이 새 행성 발견 소식을 신문에서 읽어 주자, 그녀가 로마 명계의 신 플루토를 떠올렸다. 이 제안은 천문학자 허버트 홀 터너를 거쳐 애리조나 로웰 천문대로 전해졌다.

명왕성(플루토)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플루토는 로마 신화에서 명계, 곧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다. 그는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태양에서 가장 멀고 어둡고 차가운, 오래 눈에 띄지 않던 세계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여겨졌다. 한국어 이름 '명왕성(冥王星)'도 '어두운 저승의 임금 별'이라는 이 뜻을 옮긴 것이다.

왜 하필 플루토라는 이름이 채택됐나요?

로웰 천문대는 미네르바·크로노스·플루토 세 후보를 두고 투표했다. 미네르바는 이미 한 소행성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어 탈락했고, 크로노스는 인기 없는 천문학자가 밀던 제안이라 지지를 얻지 못했다. 남은 플루토에 천문대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표를 던졌다. 이름의 첫 두 글자 'PL'이 이 수색을 시작한 퍼시벌 로웰의 이니셜과 겹친 것도 한몫했다. 1930년 5월 1일 공식 채택됐다.

베네티아 버니는 이름을 지은 대가로 무엇을 받았나요?

할아버지에게서 5파운드 지폐를 상으로 받았다. 1930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발견 당시에는 대부분 잊혔다가, 1984년 한 천문 잡지가 사연을 알리며 다시 기억됐다. 뒤에 뉴호라이즌스 탐사선의 '베네티아 버니 학생 먼지 계수기', 소행성 6235 버니, 명왕성의 버니 분지가 모두 그녀를 기려 이름 붙었다.

디즈니 캐릭터 플루토와 관련이 있나요?

디즈니의 개 캐릭터 플루토는 행성이 명명된 것과 같은 1930년에 처음 등장해, 이듬해 '플루토'라는 이름을 얻었다. 흔히 새로 유명해진 행성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지지만, 디즈니 측에 그 이유를 확증하는 공식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관련설은 정설이 아니라 흥미로운 추정으로 보는 것이 맞다.

참고한 자료

· NASA Science — Venetia Burney Phair (1918–2009), 'The Girl Who Named Pluto' (2006년 NASA 인터뷰·아침 식탁·할아버지 팰코너 마단·터너·먼지 계수기 명명·버니 크레이터)

· Wikipedia — Venetia Burney (1918–2009·1930년 3월 14일·플루토 제안·터너 전보·종조부 헨리 마단의 포보스·데이모스·소행성 6235 버니)

· Wikipedia — Pluto (naming) (미네르바·크로노스·플루토 투표·만장일치·PL 모노그램·1930년 5월 1일 채택·T.J.J. 시)

· BBC News (2006) — The girl who named a planet (베네티아 버니 인터뷰·5파운드 상·명명 경위)

· Wikipedia — Venetia Burney Student Dust Counter (2006년 뉴호라이즌스 계측기 명명·2015년 명왕성 근접)